빈 잔의 이름

 음. 정말?

 현대 도시, 어느 방 안의 마법진.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 뒤로 뜻밖의 손님이 서 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와줄 줄은 몰랐는걸. 실로 오랜만에 권주하는 놀란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기억해낸다. 지극히 서툴렀을 첫 소환에도 악마는 친절히 응했다. 시야를 방해하는 연기조차 없이 마법진 위에 나타난 악마의 꼴은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그는 인간에게는 다소 생소한 형태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든가, 섬뜩하게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든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모두를 홀릴 법한 색기를 가지고 있다든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다든가… 하는 고루한 상상 속 악마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눈에 띄게 매끈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색정적이기보단 단정하고, 입가에 걸치고 있는 미소는 예의를 차리는 듯했다. 머리카락을 헤치고 솟아 있는 검은 형체만 아니었다면 몰래 베란다로 들어온 인간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 당신이 어렵지 않은 선에서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권주하는 나쁜 버릇처럼 앞뒤를 잘라먹은 채 소원을 말했다. 어차피 통성명은 필요 없다. 악마는 진명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들으면 고막이 터져버린다고 했나? 장기 대신 솜이 찬 인형이라도 되는 듯 인간의 몸이 찰나에 찢어진다고 했던가?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악마의 이름 따위 몰라도 그만이다. 악마는 원념을 빨아들여 양식 삼는 존재. ‘타인을 해쳐서라도’ 무언가를 간절히 얻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그 존재를 존속하게끔 한다 했지. 그 소원이 무엇인지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악마는 입을 달싹대다가 물었다. 소원은?

 이미 말했어.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소명하는 것이야. 음… 조금 더 정확하게는 악마가 가진 힘의 근원에 대해 밝히고 싶다고 해둘게.

 악마가 가진 힘의 원천은 다시 말해 인간의 악함이다. 권주하는 그것이 궁금했다. 선함은 무엇이고 악함은 무엇인지, 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이 분리될 수 있는지. 그러나 이 시대에 와서는 선함은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고 악행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네가 별난 편이야? 아니면 원래 악마들은 다 이런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무른다. 자신의 표현에 부적절한 부분이 있는지 곱씹어보듯. 톡톡. 손가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평이한 목소리가 다시 공간을 채운다. 개체 간의 차이가 인간만큼이나 두드러지나? 너는… 어수룩해 보이는데.

……

 그렇게 어느 여름에, 스치는 옷깃에도 불쾌감이 이는 이 계절에, 한 인간과 한 악마가 손을 맞대고 차가운 욕망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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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하가 그 마법진의 식을 발견한 건 고서를 보관하는 어느 도서관을 찾았을 때였다. 선인의 지혜는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길이 있으니 옛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 모방품이 아닌 원형에 가장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외려 지금으로부터 먼 것을 찾아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쉽지 않을 책들을 보러 간 것이다. 종이의 틈 사이로 빼꼼히 튀어나와 있는 양피지를 잡아당긴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꼼꼼하게 읽어 그림을 외웠다. 진짜가 아니어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 서툴게 방바닥에 모양을 따라 그렸다. 그리고 진짜 악마가 튀어나왔다.
 묻는 것은 계약자, 답하는 것은 악마. 애초에 그렇게 시작된 관계였으므로 악마는 구태여 질문하지 않았다. 인간의 이름은 관찰 도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것을 권태롭게 관조하는 권주하. 그리고 그걸 관찰하는 악마. 우스운 꼴이다. 주하는 가끔은 인간들의 대화를 가만 듣기도 하였고 미술관이니 도서관이니 하는 곳에 가서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향유하기도 하였다. 그 나름 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인 듯했고, 그의 소원도 예술이 보여주는 세계 기저에 자리 잡은 ‘악함’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기인한 것 같았다.

 그가 제일 오랜 시간을 관찰하는 것은 단연 악마였다. 그는 악마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첫날 주하의 질문에 악마는 ‘악마의 생김새는 계약자가 원하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주하는 그것에 의문을 품듯이 이런 얼굴이 이상형은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이후의 관찰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권주하는 애당초 이상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류의 사람이었다.) 뒤늦은 추측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권주하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에, 인간의 형체로 현현한 것일 터였다. 그러면 하필 이 모습인 이유도 설명이 가능했다. 거울에 비추어본 악마의 얼굴은 인간들의 기준에서 미형이라 누구나 인정할 만한 모습이었다. 권주하가 잘생긴 것을 밝힌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좀 신기한 사물 취급하는 그가 객관적으로 조형이 탁월한 인간의 얼굴을 무의식중에 이런 형태로 상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순진이나 순수 따위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인간, 어둡게 가라앉아 싸늘해 보이는 낯, 소름이 끼칠만치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인형 같은 얼굴이 무구해 보였다면 거짓일까? 순백은 절대적인 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는 것. 둘 중 무엇도 되기 전의, 혹은 동시에 양쪽이 공존할 수 있는 백지의 상태이므로. 악마는 권주하를 우주의 혼돈에 비견해야 할지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를 대기 전의 흰 도화지로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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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주하는 가끔 상상치 못한 물음을 던졌다. 원체 말수가 적으니 질문 자체가 드물어 가끔이 되는 것이 맞겠다. 그는 과연 입만 열었다 하면 폭탄을 던지는 인간이었다. 말에는 실체가 없었으나 보이지 않는 것도 쉽게 읽어내는 악마의 마음은 무형의 몇 글자만으로도 쉽게 어지러워지곤 했기에. 하루는 인간이 그런 것을 물었다.

 내 안에도 사악한 마음이 있어?

 보통 인간은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을 꽁꽁 숨기고 부정하거나, 다른 사람도 누구든 자신같이 비겁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과시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는 악마인 자신보다 인간의 마음을 몰랐고 그 사실에 예외는 없었다. 자기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자신의 안에 있다면 그만큼 반가운 사실도 없을 테다.

 정말 무서운 것은 권주하의 마음속에서 사악한 것들을 읽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악행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아니었고, 외려 다른 사람들보다도 눈 깜짝 않고 나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부류에 속할 텐데도. 그 기저에는 어떤 악한 의도도 없었다. 그곳에는 악마를 두렵게 하는 선한 마음도 악마의 양식이 될 악한 마음도 없이 거대한 동공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별난 악마에겐 그 공허가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인간은 도구 없이 살아갈 수 없고, 사용한다는 것은 곧 필요를 입증하는 행위다. 그리고 악마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전부터 줄곧……. 그는 돌연변이였기에. 가족의 개념이 희미하고 종족 간의 유대감이나 소속감이 옅은 보통의 악마들과는 달리 그는 날 때부터 외로움을 느꼈다. 마치 인간처럼. 그러나 그는 인간에게 없는 권능을 소유하고 있었고 계약 없이는 인세에 발을 디딜 수도 없는 떠돌이였다. 그러므로 아주 긴 시간, 그는 사용되는 것에 족한 존재로 살아왔다. 이 거대하고 두려운 세상의 어떤 존재만은 자신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에 남몰래 위로받으며.
 그러므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존재는 대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권주하에게는 악마가 필요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나 강렬한 열망에 이끌려왔는데도. 무감한 표정 안에 무궁한 갈망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도. 그 욕망조차 어느 한순간에 사그라들 것 같아서… 자신이 없어도 언젠가는 진실에 닿아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어둠 속에서 주문을 그리는 그의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이 자신이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교차하는 상반된 감정 속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려서. 고작 그런 생각들이 이 유약한 악마를 괴롭게 만드는 것들이라.
 그 인간의 갈망은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텅 빈 잔을 채우고 싶다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잔은 아마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권주하의 소원은 ‘소원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으나 그건 적어도 악마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행위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악마의 존재가 무용하다는 걸 깨달으면 그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내쳐질 터였다. 어느새 그는 차라리 계약 파기가 선고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권주하는 매번 악마가 가장 원하면서도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궁금해졌어. 너의 이름을 부르고도 내가… 무사할 수 있을지. 부르는 것만으로 존재가 일시에 소멸해버릴 정도의 힘이라는 건 근원에 그만큼 가까운 악일 수 있다는 것이잖아? 이름은 예로부터 존재의 집약이었지.
 … 예외는 없을 거야.
 그래? 시시하네.
 악마는 인간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지 않는다. 당장의 외로움만이 해결된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것이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빈 소원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인간을 봐도, 자신이 이루어준 소원 때문에 죄 없이 죽어가는 인간들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인간과 비슷해 보여도 그는 결국 악마였으니.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기껏 인간인 주제에 악마를 불안에 떨게 하는 최악의 계약자가 죽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그의 진명을 알려준다면 계약을 끊어낼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한미한 인간의 육신과 함께 터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상으로 괴로워지는 것도 그였다. 그는 인간의 실체가 사라져도 권주하가 계속 자신의 안에 남아있을 것이 두려웠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는 악마가 잊지도 못하고 안고 갈 기억을 가지게 될까 봐. 동시에 그에게 기어이 이름이 불리고 싶은 욕망 또한 자각한다.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남기 위해선 이름이 필요했다. 하나 인간은 악마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님을 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나 진심을 몇 번이나 비튼 무엇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네가… 내게 새 이름을 주면 안 돼?
 그래도 악마인 너는 그대로 존속해?
 …… 그래.
 그렇다면 뭐… 기다려. 작품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 시간을 들여야겠어.
지금은 겨울. 바람에 나부끼는 눈의 비명이 악마에게 속삭이는 소원조차 묻어버리는 계절.
잔뜩 빨개진 손을 잡지도 못하고 악마는 생각한다. 한 번 더 소원을 빌어줘. 나만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그리고 그 소원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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