優朱

  세계는 아주 고요하다. 다만 타인에게 구태여 귀를 기울이지만 않는다면. 인간은 그 각각이 작은 우주라서, 애당초 무척 좁은 곳만을 예외로 둔 채 나머지는 온통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 존재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도, 그에서 비롯되는 이해도 대개 허상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 인간은 외따로 떨어져 서로의 인력에 끌리는 소우주. 하여 남몰래 소원한다. 자신만은 예외이기를,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 기대하였듯이. 한없이 어리석게도.

 

  맹목적인 애착, 대가 없는 애정, 신기루에 빗대어질 것들을 바라는 것은 오랜 습성이었다. 어쩌면 뼛속 깊이 새겨진 천성인지도 몰랐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끝내 품에 안지 못하는 것마저도.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한 건, 아주 오래도록 내가 바라왔던 것을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탓이다.

 

  혼잡한 심중에 떠도는 것은 단어의 나열.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상념-서약, 애정, 인간, 본질-은 원을 그리듯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까 그것은, 권주하. 그 애의 이름. 그의 시선은 나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고정한다. 그 시선 끝에서 나는 핀에 박힌 것처럼,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는 내게서 무언가를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나는 프레임 단위로 존재하는 대상이기에.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는 붉은색이었음에도,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새까만 어둠은 아주 선명히 기억에 달라붙어 있다. 무엇이든 빨아들일 것 같고, 동시에 어떤 것도 제 안으로 들이지 않을듯한 까만색. 한평생 인간을 낱낱이 해부해온 눈은 어떤 대상도 자신과 상호작용할 타인으로 보지 못했다. 그저 상대를 해체하여 가치를 재보는 그 소름 끼치는 눈을 보았을 때, 어떤 두려움이나 꺼림칙함보다도 안정감이 앞섰다면. 어쩌면 내가 원하는 애정의 대척점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진정 나의 낙원이 있다 느껴졌다면. 그 두 눈 속에서 전에 없던 아득한 평온을 느꼈다면. 그건 착각이었을까, 체념이었을까, 혹은…….

 

  되짚는 일에는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그와는 돌이킬 수 없는 맹세를 나누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당신의 앞에 인간이 아닌 작품으로서 존재하겠노라고. 종류 아닌 총량을 가늠했다. 보편을 떠나 있어도 좋았다. 내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담뿍 사랑해준다면 그의 앞에서는 무엇이 되어도 기꺼웠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길에 닿는다. 사랑의 경로야 어찌 되었든 이만한 경애는 평범한 인간이 평생 받지 못할 터였다. 여태의 삶으로 직조된 강우현이라는 존재는 그 붓 끝에서 해체되고 다시 꿰어진다. 캔버스 위에서, 돌의 형상에서, 시선의 종착지에서. 그 모든 순간 나에게만 집중되는 관심은 지나치게 달콤하여 도리어 심층에 묻어두었던 몹쓸 버릇을 일깨운다.

  만족할 줄을 모르고 갈급히 탐하는 성정은 찰나에 스치는 애정을 영원으로 착각하지 말라 외쳐댄다.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면, 더 아름다운 작품이 권주하의 눈에 든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너는 이미 이 불안마저도 꿰뚫고 있을까. 그렇다면 나의 불안은 너의 손끝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무엇 하나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권주하라는 까마득한 우주의 광막한 미지. 답을 알 수 없는 상상의 영역. 본인조차 타인에게 작품으로 비추어질 것이라 기대하는 불가해한 여자를, 나는 도무지 작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생각을 읽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싶어졌다.

  상상 속에서는 몇 번이고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거슬리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권주하, 네가 내게서 무엇도 돌려받지 않기를 원하지 않고, 나의 시선이 너의 존재를 통과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게. 그러니 너는 부디……. 그러나 이 말은 영영 입 밖으로 내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은 자신을 그리는 이에게 말을 걸지 않기에 작품으로 남는다. 권주하의 작품이란 지위를 박탈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한 망념을 나조차도 모르는 곳에 버린다.

  나를 너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작품으로 삼아줘.

© 2023. dab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