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朱夏

 아이는 결핍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색연필로 그려낸 동화의 한 장면처럼, 목가적이고 따스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부모의 모범 같은 이들 아래서 자라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으며, 금전적인 면에도 결여됨이 없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많다 함은, 그것으로 행복을 직접 살 수는 없어도 그를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토대를 구매할 수는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더 많이 가졌기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사회.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곁에 위치했던 것들은 아이로 하여금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아이에게만은 세상이 친절했던 셈이다. 웃는 얼굴은 언제나 가까웠고 친절한 말씨가 익숙했다. 그것들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지 즐겁지도 않았다. 결핍이 없어 충만한 상태에서 인간은 행복을 느껴 마땅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아이는 행복을 잘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얼마나 부유한 삶을 타고났는지 실감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기만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이는 제법 영리했기에 어릴 적부터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에 대해서 주관적 평가를 내리는 데는 취약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도 아이를 크게 동요시킬 수가 없었다. 아이는 울어야 할 상황에 울지 않았고 남들이 모두 웃을 때 따라 웃지 않았다. 양육자와 떨어져 있어도 크게 초조해하지 않았다.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부모가 눈치챌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그저 표현하는 것이 늦는 줄만 알았던 무감한 표정이 보편의 궤를 벗어난 감정 탓임을 알았을 때, 부모는 아이가 모난 데 없이 사회 안에 녹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언젠가의 그들이 느껴온 기쁨을, 가령 그들이 아이를 낳았을 때,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했을 때, 그들을 불러주었을 때 받은 벅찬 울림 따위를 그 또한 알아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조금 우회하더라도 좋으니 다만 티끌이나마 감각할 수 있도록 애타게 방법을 찾았다. 예술을 애호하던 아내가 제안한 것은 간접적 경험을 통한 깨달음.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대상에 담긴 의미를 제 안으로 포섭하는 과정. 권주하에게 한 겹 너머의 바깥세상은 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 와닿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 세계를, 감정을, 본질을 모방한 예술작품과 향유자의 관계에서 기능하는 제4의 벽은 외려 그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더욱 과장되고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으므로, 직접적인 경험보다도 그의 마음에 더 쉽게 닿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궁리 끝에 고안된 방안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아주 어릴적부터 엄마를 따라 세계적인 미술 작품을 직접 눈에 담았고, 클래식의 생생한 선율을 현장에서 귓속으로 흘려보냈다. 찬찬히 감각을 머리에 새겨가던, 아이의 이름은 권주하. 여름을 머금은 이름은 그럼에도 노상 서늘했다.

 권주하의 세상은 언제나 안개 자욱한 숲속에서 맞는 새벽. 동결된 시간 안에서 동은 터 오지 않기에, 저 멀리 보이는 희끄무레한 빛으로 저것이 태양이겠거니 짐작해보는 삶.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빛을 구태여 따르지는 않았다. 어둠이 언제나 악의 편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어둠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선명하지 않은 감각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세상에는 몰라서 더 좋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헤쳐나갈 필요도, 방법도 없는 고난도 때로는 있는 법이고. 무엇보다도 남들보다 감정이 퇴색된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권주하에게 그리 큰 역경이 아니었다. 조금 귀찮을 수는 있겠지만, 연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주하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영영 타인을 흉내 내는 삶. 예술의 밑바닥에는 늘 모방이 움츠리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것은 한편의 연극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나쁘지 않았다. 아이의 기호가 형성되기도 전부터 삶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예술은, 그렇기에 익숙한 울림으로 일상에 스몄다. 감정을 자각하게끔 도우려던 초기의 목적은 결과적으로 그리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아이는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나, 희극과 소설, 오페라 공연 따위에서 보았던 인간상을 머리로 짚어가며 따라하는 데엔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 차갑다는 평가를 들을지 몰라도 이상하다거나 소름 끼친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무딘 아이는 그것에 만족했다. 애착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으니까 깊은 관계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상적인 연기는 늘 얕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냥 반응이 조용하고 매사에 무던한 애, 그 정도로만 보이게끔. 무언가 더 나누고 싶어 하는 듯한 눈동자는 책에서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을 읽을 때처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응해줄 마음이 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모르는 척 눈을 몇 번 껌뻑이고 있으면 대개는 머쓱하게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권주하는 그렇게 애매하게 경계를 넘나들며, 원의 궤적 따라 인간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의도적으로 선을 밟는 그와 달리 어떻게든 원의 안쪽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건 문학이나 그림의 창작 의도를 헤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면적인 껍데기 안에 숨겨진 속뜻을 짐작해보고,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현상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 그건 권주하에게 무척이나 익숙하고 유일하게 흥미라고 할 만한 것이 되었기에, 그는 의외로 타인과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건 적지 않은 피로를 동반했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꼽아보자면 관찰이었다. 예술 작품은 직접적으로 대답을 종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거는 방식은 교묘하며 간접적이기에. 인간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고, 감상하고, 탐구하며, 해체하고, 뜯어서 재조립한 이후에야 그것의 언어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권주하의 눈이 세계를 담아내는 방식, 고로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에게 인간이란 작품이었으므로, 직선적인 쌍방의 소통보다 우회적이고 일방적인 관조를 좋아했다.

 그러니 권주하는 애초 예술품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인간이다. 직접 만들고 싶다거나, 손대어 참여하고자 하는 욕심 따위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제 인생이 될 작품을 첫눈에 알아본다고 한다. 그가 이해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었던 말은 우연한 기회에 그 가슴 속에 침범한다. 더없이 아름답다. 시선을 빼앗기는 경험이 생소했다. 단상 위에 선 단정한 소년은 미지의 작품이었다. 섬세하게 빚어진 아름다운 외양은 자연스레 시선을 끌었다. 부드러운 표정이나 곧고 바른 자세 같은 것들. 그럼에도 어딘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듯하여… 살아있는 이를 정말 작품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게 만들었다. 피그말리온을 떠올린다. 어쩌면 태초의 그는 사람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이상 담은 채 숨 쉬지 않는 작품이었을 지도. 터무니없는 상상임에도 불구하고 진위 여부를 묻고 싶을 정도로 그에게 전에 없던 흥미를 느꼈다. 더 알고 싶어. 겉으로 내보이지 않는 마음을 해부하고 싶어. 낱낱이 파헤쳐 그 끝을 보는 날까지 강우현을 감상하고 살피고 싶다. 그것은 권주하가 가진 최초의 욕망. 자신 둘러싼 세상을 예술로만 감각할 수 있는 소녀가 찾은 최고의 작품, 그리하여 그 작품이 그의 세계가 된 날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아직 요원한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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