𝙙𝙚𝙖𝙧—

이별은 필연이었다. 그저 조금 일렀을 뿐이다.

사실은 숱한 이별 장면을 그렸다.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근간부터 위태로운 관계였으니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붕괴가 둘 중 누구를 망칠지도. 필사적으로 외면했으나, 고개를 무엇으로부터 돌리고 있는지만 시시각각 새기는 꼴이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니 불가능한 일이다.

불안은 최악의 상황을 멋대로 상영했다. 백 번도 넘었을 공상 속에서 나는 그와의 작별을 반복했다. 그 중 어느 장면에서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고, 어딘가에선 떨리는 목소리로 거짓된 안녕을 빌었다. 조금씩 다른 그 허구의 조각들을 일시에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 있었다. 이별을 고하는 쪽은 늘 권주하라는 것.

나는 몇 번이고 이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맞는지 고민했고 골을 앓았으나 끝내 포기하지는 못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의 불안은 권주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그를 잘라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를 잃고 오갈 데 없어진 불안이 어떤 형태로 일그러질지 그려지지 않아 더욱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가끔이지만 아주 달콤한 상상도 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 이 위태로운 줄 위를 둘이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거란 착란 닮은 몽상. 나는 종종 주하의 건조한 눈 속에서, 검은 공허에 기이한 불이 붙는 듯한 모양을 보았다. 오직 나만을 그런 눈으로 본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를 관찰하는 만큼 나도 그를 보았기 때문에 모를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뻐근해지고는 했으므로, 모든 것을 태워 없앨 화마의 불씨가 일렁일 때마다 나는 흔들림 없이 곧은 두 눈동자를 생각했다. 역시 나는 그 시야 바깥에서 사는 법을 이제는 모르겠다.

그러나 권주하는 언제든 나를 버릴 수 있었다. 한때 나에게만 향했던 시선은 어느 날 표표히 옮겨갈 수 있었다. 질렸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이제 내게서 더 이상의 가치를 볼 수 없다고 평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내가 무엇을 해도 어찌 바꿀 수 없기에 더 그랬다. 그래서 늘 이별을 고하는 쪽은 권주하가 되었다. 그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붙잡는 행위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상상으로나마 놓친 손끝에 매달리기를 포기했다. 무의미한 것을 권주하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까.

배경도 대사도 조금씩 다른 지루한 이별 영화의 각본은 그렇게 몇 번씩 새로 쓰이고 지워지길 반복했다. 마침내 세상에 발표된 그 영화의 낯은 전에 없던 모습이었다. 어떤 시나리오도 들어맞지 않았다. 생각했던 대로 권주하가 내 손을 놓았다. 그런데 나는 떠나는 그 등을 볼 수가 없었다.

그야, 왜냐하면, 사실은,

권주하가 죽었으니까.

나는 결코 그런 장면만은 그려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의 상상 속에서는 내가 죽었다. 나는 내 죽음 이후의 권주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죽는 순간에 세상은 모든 것을 잃고 점멸했다. 어쩌면 그가 조금도 동요 않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차단했을 수도 있겠다. 여하간 나의 죽음이란 차라리 괜찮은 결말에 속했다. 그가 나의 죽음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인할 길이 요원하였기에.

내가 몇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그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 이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권주하는 종종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호흡하는 소리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몇 번이나 직접 귀에 담았는데도 꿈결에 들었던가 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죽음조차 그 끝에 존재하지 못할 것 같았는지.

우습게도 다 지나고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그는 죽음과 퍽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공유한 시간이 짧지는 않았는데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할 수가 없으니. 마치 처음부터 그가 환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떠나가고 남겨진 자리가 이렇게나 고요할 수 있던가. 머무른 곳에는 어떻게든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고, 권주하도 딱 그만큼의 무게로 세상에 남았다. 일부러 흔적을 지우고 간 것도 아닌데 남은 것이 너무나 드물게 느껴졌다. 어쩌면 난 달의 뒷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도 같다. 주하가 살아있을 때는 결코 보지 못했던 부분을 기어이 파헤치고 싶었던 걸까? 안다고 해도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진다고.

이별은 완결이었다. 슬프고 어렵지만 분명한 끝을 가리키는 지표였다. 그러나 죽음은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어떤 것도 되지 못한 채로 엉성하게 놓여있다. 영원히 그 미완결의 상형을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네가 살아있어도 나는 묻지 못했겠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물어보지 않음을 선택한 미래가 되었을 것이다. 네게 묻고 싶었던 아주 많은 말들이 그저 묻혀간다. 땅 아래로 돌아갈 너의 몸을 따라서.

나는 슬프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의 관계가 지금도 유효하다면 네 죽음에 나의 슬픔은 가당한가? 자신의 미완성됨이 슬퍼 우는 피조물이 있기는 하던가. 자신을 봐줄 사람을 잃었다는 이유로 작품이 눈물을 흘릴 수나 있던가. 관계가 유효하지 않다면 내게는 더욱이 슬퍼할 자격이 없었다. 우리는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아니었으니.

다만 어찌할 줄을 몰랐다. 네가 죽는 미래를 한 번도 그려보지 않아서…

죽은 것은 너인데 나의 미래가 잘려나간 것만 같았다.